본문 바로가기
로마역사

로마 제국의 황금시대: 아우구스투스와 파트리키의 역할

by romeking 2024. 2. 21.

로마 제국의 황금시대: 아우구스투스와 파트리키의 역할 에 대해서 살펴 봅니다.

 

로마 제국은 고대 유럽의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있는 제국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기원전 27년에 공화정을 폐지하고 제국으로 거듭난 이후로, 약 200년 동안 지중해 세계를 평화롭고 번영하게 통치했습니다.

 

이 시기를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고 부르는데, 이는 '로마의 평화'라는 뜻입니다. 팍스 로마나의 시대에는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큰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발전의 주역은 바로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친구이자 장관인 아그리파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어떻게 로마 제국의 황금시대를 열었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로마 제국의 황금시대: 아우구스투스와 파트리키의 역할

로마 제국의 황금시대: 아우구스투스와 파트리키의 역할

 

아우구스투스: 로마 제국의 창시자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63년에 로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였는데, 그는 로마의 유명한 장군이자 정치가였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카이자 양자였습니다. 카이사르가 기원전 44년에 암살당하자,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카이사르의 적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와 함께 제2차 삼두 정치를 이루어 로마를 통치했습니다. 그러나 삼두 정치는 곧 붕괴되었고, 아우구스투스는 안토니우스와 그의 연인이자 이집트의 여왕인 클레오파트라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기원전 31년에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한 아우구스투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자살로 몰아넣고, 이집트를 정복했습니다. 이로써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공화정을 폐지하고 제국을 세웠습니다.

 

그는 원로원과 민회에게 자신에게 '존엄자'라는 칭호와 '제1시민'이라는 지위를 부여하게 했습니다. 또한 그는 집정관, 호민관, 대제사장 등의 직책을 겸하면서, 군사적, 행정적, 종교적 권력을 독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공화정의 전통과 형식을 존중하는 척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황제라고 부르지 않고, 프린켑스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제1시민'이라는 뜻으로, 공화정 시대에 존경받는 정치가들에게 붙던 칭호였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렇게 자신의 권력을 위장하면서, 로마의 정치와 사회를 개혁하고 안정화시켰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영토를 확장하고 국경을 안전하게 유지했습니다.

 

그는 스페인, 갈리아, 일리리아, 판노니아, 다쿠아, 노리쿰, 알프스 산맥 등지에 군사 행정구역을 설치하고, 로마의 군사력을 강화했습니다. 또한 그는 파르티아와 평화 협정을 맺어, 카이사르가 잃어버린 군기를 되찾았습니다. 그는 로마의 병사들에게 토지와 연금을 보상으로 주고, 그들의 충성심을 얻었습니다. 그는 또한 로마의 동맹국들을 잘 관리하고, 그들의 자치권을 인정하면서도, 로마의 지배력을 유지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경제와 사회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는 로마의 조세 체계를 개선하고, 공공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습니다. 그는 로마 시내와 제국 전역에 도로, 다리, 수도, 사원, 극장, 목욕탕 등을 건설하거나 개조했습니다. 그는 특히 로마 시를 '흙벽돌로 된 도시에서 대리석으로 된 도시로 바꾸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는 또한 경찰과 소방을 설치하고, 곡물과 물을 저렴하게 공급하고, 노예들과 빈민들에게 복지를 제공했습니다. 그는 로마의 문화와 예술을 장려하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역사와 신화를 강조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종교를 개혁하고, 자신을 신성화했습니다.

 

그는 로마의 전통적인 다신교를 부활시키고, 신전과 제단을 복원하고, 제사와 축제를 재개했습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조상이라고 주장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신으로 선언하고,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자신의 친위대인 로마 근위대를 통해 자신의 신격을 보호하고, 제국 전역에 자신의 초상화와 동상을 세웠습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이름을 딴 달인 8월을 만들고, 자신의 업적을 기록한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을 남겼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서기 14년에 죽음

 

아우구스투스는 서기 14년 8월 19일에 76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후계자로 양자인 티베리우스를 지목했습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유서에 "내가 로마를 흙벽돌로 된 도시에서 대리석으로 된 도시로 바꾸었다"고 적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로마 제국 전체에 큰 슬픔을 안겼습니다. 원로원과 민회는 그를 신으로 선포하고, 그의 이름을 딴 달인 8월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유해는 로마 시내에 있는 그의 건설물 중 하나인 아우구스투스의 마우솔레움에 안장되었습니다.

 

아그리파: 아우구스투스의 친구와 장관

 

아우구스투스의 황금시대를 함께 만든 사람 중에는 그의 친구이자 장관인 마르쿠스 비니우스 아그리파가 있습니다.

 

아그리파는 기원전 63년에 로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기사 가문 출신이었으며, 아우구스투스와는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삼두 정치와 내전에 함께 참여하고, 그의 군사적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기원전 36년에는 시실리아에서 섹스투스 포므페이우스를, 기원전 31년에는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기원전 19년에는 칸타브리아 전쟁에서 이베리아 반도의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그는 또한 로데스, 가울,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서도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아그리파는 군사적으로 뛰어난 뿐만 아니라, 행정적이고 건축적인 역량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장관으로서 로마의 공공 사업을 총괄하고, 도로, 수도, 목욕탕, 사원, 극장 등을 건설하거나 개선했습니다. 그는 특히 로마의 수도 시스템을 혁신하고, 아쿠아 율리아 수도국을 건설했습니다. 그는 또한 로마의 상징적인 건물인 파나테온을 지었으며,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는 또한 로마의 교육과 문화를 장려하고, 학교와 도서관을 설립했습니다.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의 가족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와 결혼하고, 그녀와의 사이에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의 자녀들 중에는 후에 황제가 된 가이우스와 루키우스가 있습니다. 그는 또한 아우구스투스의 삼촌이자 장관이었던 마르쿠스 비니우스와는 형제애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에게 충성과 존경을 보이고, 그의 정책과 목표를 지지했습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친구이자 동료이자 조력자였습니다.

 

아그리파는 서기 12년에 51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아우구스투스에게 큰 슬픔과 공허감을 안겼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를 치하의 영웅이라고 칭찬하고, 그의 유해를 로마 시내에 있는 아우구스투스의 마우솔레움에 안장했습니다. 그는 또한 그의 이름을 딴 달인 9월을 만들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황금시대: 아우구스투스와 파트리키의 역할" 에 대한 글을 작성해 보았습니다.